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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러시아, 인도, 중국 같은 비서방 세계에서 유행하는 담론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환경문제, 혹은 기술 진보로 인한 문제는 서구인들의 가치관의 한계로 인한 것이며, 러시아, 인도, 중국 같은 비서방 세계들이 서구식 자유주의, 자본주의, 합리주의에서 벗어난 대안 가치를 제시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비서방적 가치관(인도, 러시아, 동아시아적 가치관)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환경문제, 더 나아가 기술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https://www.noemamag.com/the-attack-of-the-civilization-state/)
하지만 인간 조직들 사이의 단기적 생존을 위한 체제경쟁이 문명의 과잉성장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생태재앙으로 이어지는 패턴은 과거 문명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생태재앙으로 인해 붕괴했던 아나사지 문명, 마야 문명, 이스터 섬 문명은 비서구 문명이었음에도 그러한 붕괴를 맞이했습니다.(Diamond, 2004) 따라서 인도 혹은 동아시아 문명이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근거는 희박해 보입니다. 사실 그들이야 말로, 비서구와 서구 사이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체제 경쟁을 유발하며 환경문제의 심화에 기여하고 있지 않은가요?
일부 유교주의자들은, 국가들 사이의 체제 경쟁을 중단시킬 유교식 해결책, 즉 "모두가 인(仁)과 예(禮)라는 가치에 합일해 나가면 갈등과 경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仁)"과 "예(禮)"라는 가치관을 설계해 장기간 유지하는게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반박되죠.
예를 들어, 모두가 따라야 할 인과 예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모종의 헌법을 작성해도, 동일한 헌법 조항을 대법관들마다 해석을 다르게 하고, 세대마다 재해석되는 문제가 있죠. "인(仁)"과 "예(禮)"를 전세계에 보급해도, 국가들마다 인과 예를 다르게 해석할 것이고, 세대마다 다르게 해석할 것이고, 따라서 갈등과 경쟁도 종식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헌법을 미래 세대가 재해석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헌법 작성에 쓰인 언어와 개념은 해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사회와 문화가 바뀌며 단어의 의미도 바뀝니다.
예를 들어, 미국 헌법은 200여년 전에 쓰여졌고, 미국 헌법의 몇몇 조항들은 시대마다, 학자들마다, 법관들마다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미래 세대가 헌법을 재해석하는 것을 막는 것이 불가능한 또 하나의 이유는, 사회적 가치와 규범이 시간이 흐르며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 용인 가능하고 적절한 행동이, 다른 시대에는 용인할 수 없고 부적절한 행동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가치와 규범이 변화하면서, 헌법 조항의 해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론, 몇몇 헌법 조항은 다른 조항들에 비해 재해석의 여지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문화 혹은 사회적 가치에 종속되지 않는 명쾌한 언어로 작성된 헌법 조항들은 미래에 재해석될 여지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항들 조차도 재해석을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사회적, 문화적 가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즉, 언어 그 자체의 내재적 모호함과 불확실함,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와 규범의 변화 때문에, 모종의 가치 체계를 합리적으로 설계하고, 그 가치 체계를 영구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카진스키, 2022)
요약하자면, 서방세계의 대안으로서, 러시아, 인도, 중국의 "아시아적 가치"가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환경문제와 기술의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Diamond, Jared, Collapse: How Socie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 Viking Press, 2004.
카진스키, 시어도어 존, 한아람 역, 반기술 혁명 - 왜? 어떻게?, 비공,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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