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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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사람들이 환경문제를 접했을 때,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일반인부터 나름 먹물 좀 먹었다는 지식인들까지 포함해 가장 흔한 반응은 미래의 기술이 환경문제를 전부 해결해주리라는 것이다. 반기술주의자로서 필자는 이런 대책없는 맹목적 기술낙관론을 접하면 말문이 막힌다. 대체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싶어지며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왜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는게 불가능한지 설명하는 것이다.

환경문제를 기술로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2022년 현재 인류가 처한 기후변화, 서식지 파괴, 환경오염, 과잉 사냥/어획, 침입종 문제 같은 환경문제는 애초에 인류가 진보한 기술을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이다. 애초에 기술이 없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드는 시도는, 마치 숙취에서 깨겠다며 해장술을 들이키는 알코올 중독자, 사채빚을 사채로 갚으려드는 도박 중독자, 구정물로 옷을 세탁하려는 시도와 비슷한 모양새이다.

환경문제를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일련의 주장을 학계와 언론에서는 녹색성장론 또는 탈동조화(decoupling)론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술 진보, 경제성장과 환경보호가 양립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녹색성장은 최근 몇년 사이에 빠르게 수많은 국가들과 기업들의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녹색성장론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건실한 주장이 곳곳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국가들과 기업들은 이러한 비판을 외면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경제성장과 기술 발전이 환경보호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의 이익을 침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에서는 녹색성장 또는 탈동조화가 실현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2. 녹색성장은 실현 불가능하다.

a) 에너지 수요 증가

자원을 채굴할 때는 채굴 난이도가 낮은 자원을 먼저 채굴하게 된다. 따라서 자원을 채굴할 수록 이전과 동일한 양의 자원을 채굴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며, 단위 자원 당 환경파괴의 총합은 증가하게 된다.

b) 반동 효과

효율성 개선을 통해 절감한 자원과 비용은 동일한 종류의 소비에 재할당되거나(예: 연비가 좋은 자동차를 더 자주 사용) 다른 종류의 소비에 재할당된다.(예: 연료 절감을 통해 얻은 비용으로 비행기 표를 구매해 장거리 휴가를 떠남) 효율성 개선은 경제 구조 변화를 유발해 더 많은 소비를 유발할 수도 있다.(예: 자동차 연비 개선으로 인해 대중교통과 자전거 사용량이 감소하고 자동차 기반 교통 체계가 강화됨)

c) 문제 전가

특정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적 해결책은 새로운 환경문제를 만들거나, 다른 종류의 환경문제를 심화시킨다. 예를 들어, 전기자동차 생산은 리튬, 구리, 코발트 수요를 증가시킨다. 바이오연료 사용량 증가는 서식지 파괴로 이어진다. 핵발전소는 핵 위협과 방사성 폐기물 문제를 유발한다.

d) 과소평가된 서비스 산업의 영향력

서비스 경제는 물질 경제 기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서비스 산업은 재화 산업으로 인한 생태발자국을 대체하는게 아니라, 증가시킨다.

e) 재활용의 한계

현재 재활용 비율은 낮으며, 느린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재활용 과정은 여전히 상당한 양의 에너지와 원자재들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팽창하고 있는 물질 경제의 자원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재활용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f) 부족한, 부적절한 기술 혁신

기술 진보는 생태계 지속가능성에 필요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으며, 환경문제를 줄이는 방향의 혁신을 일으키지 않는다. 기술 진보는 바람직하지 못한 기술을 대체할 만큼 획기적이지 않으며, 그 자체로 충분한 탈동조화를 가능케 할 만큼 빠르지도 않다.

g) 비용 전가

국지적으로 탈동조화가 관측된 사례들 대부분은 환경문제를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외부화해서 얻은 것이다. 생태발자국에 근거한 조사에 따르면 탈동조화는 지지부진하며, 미래에 안정적인 탈동조화가 실현될 가능성조차도 의심스럽다.(Parrique T. et al, 2019)

3. 기술 체제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율적 현상이다.

일부 지식인들은 위에서 제시한 녹색성장론 비판을 인정한다. 이를 인정하는 지식인들은 녹색성장론을 비판하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탈성장론을 제시한다. 독일의 경제학자 니코 페히가 탈성장론을 대표하는 지식인일 것이다. 하지만 탈성장론자들 역시 결국에는 탈성장을 실현시킬 모종의 계획 사회적 제안을 내놓는 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밖에 없다. 탈성장론이 실현 불가능한 이유는,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가 그의 저서 반기술 혁명 제1장 “사회 발전은 결코 인간의 합리적 통제 대상이 될 수 없다”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카진스키, 2022, 제1장)

카진스키는 그의 저서, 반기술 혁명 제2장에서 7가지의 전제들을 제안했다. 그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i)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서는 자기증식 체제들이 등장할 것이며, 자연선택을 통해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생존, 증식 수단을 갖추게 될 것이다.

ii) 단기적으로, 자연선택은 장기적 결과에 신경쓰지 않고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기증식 체제들을 선호한다.

iii) 주어진 상위체제의 하위체제들은 자신의 상위체제와 그 상위체제의 환경에 의존한다.

iv) 자기증식 체제가 확장할 수 있는 지리적 크기는 이동과 통신 문제로 제한된다.

v) 활용 가능한 이동, 통신 수단의 한계는 자기증식 인간 집단의 지리적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가장 일관적으로 중요한 한계이다. 즉, 모든 자기증식 인간 집단들이 활동범위를 최대로 넓히지는 않지만, 자연선택은 활용 가능한 이동, 통신 수단을 이용해 활동 범위를 최대로 확장하는 자기증식 인간 집단을 만들어낼 것이다.

vi) 현대에는, 자연선택은 지구 전체에서 활동하는 자기증식 인간 집단들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인류가 언젠가 기계나 다른 존재에 의해 대체되더라도, 자연선택은 여전히 지구 전체에서 활동하는 자기증식 체제들을 만드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vii) 오늘날처럼 이동, 통신 기술이 충분히 발전해 자기증식 체제들의 활동 범위가 더 이상 제약 받지 않는다면, 자연선택은 소수의 자기증식 체제들에 힘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카진스키, 2022, 제2장)

4. 결론

여기서 우리는 기술 발전, 경제성장과 생태계 보호가 양립가능하다는 녹색성장론, 또는 탈동조화론이 왜 실현 불가능한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탈성장 사회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탈성장론 역시 실현 불가능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기술 체제와 지구 생태계는 공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술 체제가 존속하려면 지구 생태계가 절멸되어야 하며, 지구 생태계가 존속하려면 기술 체제가 절멸되어야 한다. 녹색성장론이 됐든, 탈성장론이 됐든, 이는 기술 체제와 지구 생태계라는 공존 불가능한 두 가지를 양립시키려는 부질없는 시도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이 개를 강아지 시절부터 마치 가족처럼, 친구처럼 사랑하고 돌봐왔다. 개 역시 그의 곁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주었으며, 주인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개가 광견병에 걸렸다. 그는 그의 개가 건강했던 시절을 추억할 수도 있다. 왜 하필이면 내 개가 광견병에 걸리게 되었느냐고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해야할 일은 분명하다. 그 개를 죽이는 것이다. 광견병에 걸린 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개와 함께 살아가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오늘날의 기술 체제가 바로 광견병에 걸린 개와 같다.

5. 참고문헌

Parrique T., Barth J., Briens F., C. Kerschner, Kraus-Polk A., Kuokkanen A., Spangenberg J.H, Decoupling debunked-Evidence and arguments against green growth as a sole strategy for sustainability, July 2019.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반기술 혁명, 도서출판 비공, 한아람 역,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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