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에게 보내는 편지.

Copyright © 2022 Theodore John Kaczynski. Translated by Aram.

2022년 5월 14일

아람에게,

귀하는 동아시아인들이 미국인, 유럽인들보다 더 순종적, 순응적이므로 혁명을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는 그 주장이 설득력 있습니다. Technological Slavery, Letter to Dr. Skrbina, November 23, 2004, Part IV.C를 참고하십시오.

1960년대 일본에 오랜기간 체류한 스페인인 호세 마리아 지로넬라(José María Gironella)는 귀하의 주장과 같은 경험을 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타지마’라는 일본인의 발언을 적었습니다. “우리는 서열을 좋아하고 복종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복종할 때 더 안전하고, 더 편하다고 느낍니다.”1 그리고 다른 일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이 일본을 민주화하는 데 성공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국인들이 우리에게 민주화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2 하지만 동시에 지로넬라는 당시 일본에 야생의 자연에 대한 도가道家적 애착이 만연했다고 보고했습니다.3 예를 들어 다음과 같습니다.

등산길은 구불구불했고, 올라갈 수록 숲은 점차 울창해졌다. 젊은 여성 미케도는 넋이 나간 듯 숲을 바라보았다… 그 소녀가 우리를 둘러싼 자연 속에서 깊은 황홀경에 빠졌다는 것은 분명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순간이었지만, 벌목공들이 나타나 그 황홀경을 깨뜨렸다. … 그것은 신성모독이었다. … 미케도가 벌목공들에게 소리쳤다. ‘미친놈들!’4
우리가 한적한 공터에 도착하자 미케도가 말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5

하지만 저는 1960년대 이후로 일본 문화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2018년 이코노미스트 지는 “일본 최대의 치매돌봄회사 MCS”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 아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중국은 유별난 저신뢰 사회이지만, 가족애는 일본보다 강하다.
MCS가 중국에 진출했을 때… 일본인 은퇴자들이 원했던 것과 동일한 사생활과 조용함이 보장되는 1 인실을 제공했지만, 중국인 고객들은 동반자와 ‘레나오(renao)’라는 생기있는 소음을 요구했다.6

제가 일본인들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적겠습니다.

저는 일본보다 중국에 대해서 훨씬 많이 읽어왔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언제나 처럼 농노로 살았습니다”라는 귀하의 발언에서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농노”라는 단어의 정의를 넓게 잡아도, 정확히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농노로 살았는지가 불확실합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중국사와 중국 문명 전문가 프레데릭 W. 모트(Frederick W. Mote)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는 송나라 시대부터 1800년대까지의 중국인들 대부분이 사유지를 갖고 있는 자영농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땅을 자녀, 손자, 혹은 타인에게 물려줄 수 있었으며, 원한다면 땅을 떠날 수도 있었다…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그러한 조건들이 형성되었다...7

하지만 모트는 이러한 관점이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에브레이(Ebrey)는 반대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에브레이에 따르면, 중국의 대부분의 땅은 대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지주들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쌀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산악지역에는 대지주가 없다시피 했으며, 대부분의 농부들이 자영농”이었습니다.8 에브레이의 관점이 옳다면, 농촌 인구를 억압하는 “농노제”의 측면에서 중국은 중세시대 유럽과 어느 정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과 일본에는 무수히 많은 반란들이 있었지만, 그 반란들은 구시대의 가치를 종식시키지 못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반란들은 그저 왕조의 교체를 의미했습니다...”라고 귀하는 적었습니다.

중국사를 통틀어 꽤 많은 반란들이 발생했습니다.9 설령 반란자들이 구시대의 가치에 도전하지 않은 깡패 무리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확실히 이들은 순종적이거나 순응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들은 실제로 구시대의 가치에 도전했습니다.10

귀하는 동아시아의 반란자들이 가끔씩 왕조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구시대의 가치를 바꾸는 데는 실패했으며 옛 왕조가 같은 종류의 새로운 왕조로 바뀌는 데 그쳤다고 적었습니다. 반면에 “서양사의 경우… 반란/혁명의 결과 많은 경우에 구시대의 가치가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도래했습니다.(예: 서로마의 붕괴, 16세기의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미국 혁명, 러시아 혁명 등)”이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시민들의 반란적 충동이나 불복종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아마도 반복된 전염병으로 인한) 점진적인 인구감소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타락으로 인해 북방 야만인들의 침공에 취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북방 야만인들은 로마의 문화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중국 역시 북방의 야만인들에게 정복당했지만, 중국은 서로마 제국 말기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았고, 문화적, 경제적으로 훨씬 더 활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야만인들은 중국의 문화와 가치 체계에 흡수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유럽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파편화된 반면, 중국 역시 가끔씩 정치적으로 분열되기는 했으나 비교적 통일된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서유럽 수준의 분열을 겪은 바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중국사와 유럽사가 다른 길을 걷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발생한 혁명들로 인한 가치관 변화의 근본적 원인은 유럽인들이 내재적으로 더 반항적이거나 비순응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주체들로 분열된 서유럽에서 자연선택이 작동한 결과입니다. 15세기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치열한 경제적, 군사적 경쟁으로 인해 포르투갈과 스페인 정부는 값비싼 상품들의 무역망을 독점하기 위해 금광과 은광을 얻고자 해외 원정을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 역시 이러한 시류에 동참했습니다. 해외 원정을 통해 유럽인들은 다른 문명들의 새로운 사상을 접했고, 동시에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급진적으로 낡은 가치를 버렸으며,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을 통해 결국 서양은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위대한 혁명들은 그저 서양의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정치적 전환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15세기 중국은 동시대 유럽보다 훨씬 크고 진보한 배를 사용해 해외 원정을 한 바 있으며, 중국의 탐험대는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도달했습니다. 사실 중국인 상인들은 15세기 이전에도 동아프리카와 무역을 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서쪽으로의 탐험을 중단했으며, 해외 영토를 점령하고 식민지 삼는 방식으로 상인들의 무역활동을 지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중국에게는 외부의 경제적 경쟁자가 없었고, 중국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한 세력도 없었으므로 중국 정부에는 그러한 활동을 할 동기가 없었습니다.11

중국인들은 기술 진보에도 능했습니다. 1100년 무렵부터 18세기까지 중국은 이미 서양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진보한 방식으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했습니다.12 하지만 서양과는 달리 중국에는 산업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는 철강 산업들이 철저하게 중국 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으므로13 중국 내부에서 경쟁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외부로부터 심각한 경제적 경쟁의 압박을 받지 않았으며, 따라서 중국 정부에게는 사기업과 자유경쟁을 허용해 진보를 가속할 동기가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반란을 일으키는 데 능했으며, 그들은 낡은 가치관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낡은 가치관을 새로운 가치관으로 교체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부터 1900년까지 중국에 서양의 새로운 사상들이 도래하고, 무엇보다도 중국이 서양으로 인해 압도적인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경쟁의 압박을 받았을 때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의화단 운동 당시 서구 열강들과 일본에게 수치스러운 침략을 당한 결과, 중국인들은 더 이상의 수치를 피하기 위해 전통적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 체제와 신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14

저에게는 중국인들이 서양인들보다 더 순종적이거나, 더 순응적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뒷받침할만한 두 가지의 사례가 있습니다.

(I) “사람들로 붐비는 공동체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중국 마을과 대가족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정교한 사회 규범을 관찰해야만 했다. 상책은 대담한 독립심이 아니라, 순응이었다...”15

이 서술이 정확하다면, 중국인들이 혁명이나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중국인들의 충성심, 즉 중국인들의 순응적 태도는 오직 대가족이나 마을에 국한되어왔습니다.16 지역 공동체를 향한 충성심은 오히려 대규모 사회 조직을 상대로한 반란을 손쉽게 만들어줍니다.

(II) 미국에서 중국계, 혹은 여타 동아시아계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입니다.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성실하게 일하고 출세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챙깁니다. 아마 그들의 마약중독율과 범죄율은 굉장히 낮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계 미국인들이 이러한 측면에서 순응적이라는 것은 그들이 더 자기절제력 있고, 다른 미국인들보다 더 선견지명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범죄행위의 대부분은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반란이 아닙니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마약에 중독되거나, 학교와 직장에서 불성실한 미국인들 대부분은 그들이 자기절제력이 부족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마약에 중독되거나 학교나 직장에서 실패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중국인들이 미국인들보다 자기절제력이 더 강하고, 더 선경지명이 있다면, 중국인들은 미국인들보다 더욱 성공적인 혁명가가 될 수 있습니다. 혁명 운동은 철저히 규율잡혀있어야 하며, 철저히 조직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7

제가 앞서 지적한 바, 무엇보다도 역사가 중국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데 능하며, 중국의 권력 구조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데 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가 장기적으로 중국에서의 반기술 혁명의 전망에 대해 비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중국에 대해 아는 바는 오직 몇 권의 책과 기사에서 읽은게 전부이기 때문에 제 의견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귀하께서 설득력 있는 근거를 보여준다면 제 생각을 바꿀 의사가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의 반기술 운동에 대해 귀하로부터 더 많은 의견을 듣기를 기대합니다.

야생의 자연을 위해,

테드 카진스키

각주

1. José María Gironella, El Japon y su duende, Editorial Planeta, Barcelona, 1970, pp. 35-36. 저는 최근에 익명의 독일인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독일인들은 법과 질서, 규율과 사회적 거리두기, 복종과 예측가능성이 더 편하다고 느낍니다.” 독일인들이 일본인들보다 덜 순응적인가요?

2. Ibid., p. 41.

3. Ibid., pp. 144-45, 166, 173.

4. Ibid. p. 166.

5. Ibid., p. 173.

6. The Economist, Nov. 10, 2018, p. 46.

7. Mote (<반기술 혁명>의 참고문헌), p. 365. p. 366 참고.

8. Ebrey (as in the List of Works Citied for Technological Slavery, third or fourth edition), p. 155.

9. E.g.: Mote, pp. 207, 301, 521 & passim. Michael Dillon, China: A Modern History, Paperback Edition, I.B. Tauris, London, 2012, reprinted 2017, pp. 65, 84-85, 200& passim. Mary Backus Rankin, “The Revolutionary Movement in Chekiang: A Study in the Tenacity of Tradition,” in Mary Clabaugh Write (ed.), China in Revolution: The First Phase, 1900-1913,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Connecticut, second printing, 1971, pp. 321-22.

10. E.g.: Mote, pp. 502, 526-533. Ebrey, pp. 73, 240. Dillon, pp. 24-25, 66.

11. Mote, pp. 613-17.

12. Mote, p. 363. Ebrey, pp. 143-44.

13. Mote, pp. 362-63.

14. Wright, pp. 1-63의 서문을 참고. 특히 pp. 1-3, 16-17, 27-29를 참고.

15. Ibid., pp. 53-54.

16. Ibid., pp. 9, 37. Ebrey, p. 59. Fung Yu-lan,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edited by Derk Bodde, The Free Press, a division of Simon & Schuster, New York (apparently a reprint of the Macmillan edition of 1948), pp. 21, 25-26. Hoffer, §31, citing Hubbard, p. 170 (Hoffer & Hubbard as in the List of Works Cited for Technological Slavery).

17. 반기술 혁명, 제4장, 구획 1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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