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변호하며

폭력을 변호하며(In Defense of Violence)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뉴욕타임즈가 내 선언문을 출판해주면 테러를 중단하겠다고 협상할 때, 나는 선언문에서 폭력을 선동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주류 언론들이 폭력을 선동하는 글을 출판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산업사회와 그 미래"는 혁명에서 폭력의 역할을 축소했다. 현실적으로 기술-산업 체제에 맞서는 혁명은 분명히 어느 정도의 폭력을 수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힘과 폭력은 최후의 수단이다. 중대한 사회적 갈등이 협상을 통해 해결되지 않으면, 물리적 힘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산업사회와 그 미래 문단 125~135에 서술한 바, 기술 체제를 상대로 타협할 경우 무조건 패배한다. 기술 체제는 절대 현상유지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기술 체제는 언제나 그 힘을 키우려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한다.(문단 164). 우리와 기술 체제 사이의 갈등은 양보 불가능하며 결국에는 물리적 힘으로만 해결될 것이다. 기술 체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힘과 폭력을 사용한다. 그게 바로 경찰과 군대의 존재 목적이다. 우리 혁명가들이 일체의 폭력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대단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나는 무차별적인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비폭력적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다. 하지만 나는 혁명에서 폭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며, 폭력을 쓰는게 유리한 상황에서 바로 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술 체제가 우리를 폭력을 혐오하도록 가르치는 이유는 폭력이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기술 체제는 무엇보다도 질서를 필요로 한다. 체제는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로저 레인은 산업 혁명 이전의 미국 사회는 오늘날보다 훨씬 폭력에 관대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비폭력이 중요해진 이유는 산업 체제가 질서정연하고 온순한 시민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America: Historical and Comparative Perspectives의 제12장 참고.) 몇몇 예외 사례들이 있기는 하지만, 체제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진심으로 폭력을 거부한다. 기술 체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하지만, 체제는 폭력의 정도를 가능한 최소화 하려고 노력한다. 폭력 그 자체가 사회적 스트레스를 유발해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기 기분대로 사람을 구타하는 "나쁜 경찰"은 체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술 사회에게 있어 이상적인 경찰관은 최소한의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관이다.

비폭력주의자들은 대부분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부류는 순응주의자들이다. 그들이 비폭력주의자인 이유는 체제가 그들을 세뇌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부류는 겁쟁이들이다. 세번째 부류는 성인들이다. 이들은 진정한 인류애를 기반으로 비폭력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순응주의자들과 겁쟁이들에게는 경멸조차 아깝다. 반면에 성인들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원칙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사실상 혁명을 포기하는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혁명에 수반되는 혼란과 폭력 속에서 그들은 친절함과 연민의 가치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 그들이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잔인함을 없애는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승리를 위해서는 강인한 전사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폭력을 거부하는 이유는 오직 사회적 합의에 근거한다. 이는 상황에 따라 폭력에 대해 사회가 다르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쟁처럼 체제의 승인 하에 이루어지는 폭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체제의 승인을 받지 못한 폭력만을 두려워한다.

내 변호사는 내가 미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신경심리학자 왓슨 박사를 데려왔다. 심리검사가 끝난 후, 왓슨 박사는 나에게 폭탄테러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무엇보다도 폭탄테러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나처럼 지적인 사람이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든 군인이었다면, 왓슨 박사는 나에게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군인이 일말의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이 적군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점은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연민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술-산업 체제를 무너뜨릴 경우 분명히 전세계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게될 것이다. 붕괴가 갑작스럽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것이다. 살충제도, 화학비료도, 유전자 조작된 씨앗도, 농사기계들을 돌릴 연료도, 부품도, 도시에 식량을 나를 트럭과 기차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기술 체제가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해체된다 하더라도, 인구 감축과 전근대적 농업으로의 전환이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량 부족과 생필품 부족에 시달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회 질서가 무너질 것이며 싸움이 빈번할 것이다. 역사를 보라! 문명의 급격한 붕괴 후에는 언제나 폭력이 발생했다. 더 진보한 문명일 수록, 폭력도 극심했다.

현대 중산층 문화는 폭력성을 유난히 심하게 억압한다. 인간을 비롯해 대부분의 포유류들에게 어느 정도의 폭력성은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이다. 인류 역사에 걸쳐 존재했던 대부분의 사회들은 오늘날의 중산층 사회에 비해 훨씬 폭력에 관대했다. 일부 원시 사회들이 대단히 비폭력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사례들은 현대 사회가 고귀한 야만인들과 비교해 훨씬 폭력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용도로 쓰인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원시 사회들은 현대 사회에 비해 훨씬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은 자주 무시된다. 예를 들어 데릭 젠슨(Derrick Jensen)은 Listening to the Land (Sierra Club Books, 1995, page 3)에서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오카나간 인디언들이 결코 물리적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칭송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이 유별나게 호전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해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은 심지어 전쟁을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겼으며, 젊은 남성들은 그저 전쟁의 영광을 느끼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켰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두고 남자들을 비난할테지만, 모든 남자들은 여성에게서 태어났다. 호전적인 부족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의 아들이 용감한 전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젊은 남성들이 전쟁의 영광을 추구한 이유 중 하나는 젊은 여성에게서 인기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원시 사회의 전쟁은 현대전과 대단히 달랐다. 오늘날 병사들은 정치인들과 독재자들의 야욕을 위해 동원된다.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들 대부분은 징집병들이며, 설령 자원입대 했다 하더라도 프로파간다에 세뇌되었기 때문에 자원입대하는 것이다. 현대의 전장은 병사 개인의 용기와 능력이 생존 확률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 도살장이다. 반면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싸웠다. 그들의 전쟁은 소규모였기 때문에 병사 개인들은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전쟁은 현대전처럼 대규모로 환경을 파괴하지 않았다. 사실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줄어든 덕분에 환경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세상에서 폭력이 사라진다면 평균 수명이 오를 것이다. 현대 사회의 평균수명은 유례없이 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대단히 병들어있다. 평균 수명이 훨씬 짧은 사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사회들의 스트레스, 절망, 불안장애, 심리적 고통은 현대 사회보다 훨씬 적었다. 이는 인간의 복지에 있어 평균 수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에 있어서는 더더욱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독자들이 내가 폭력 그 자체를 옹호한다고 착각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다. 오히려 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해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비폭력은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오직 기술-산업 체제를 제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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